부사 성여신은 15세 때 약포(藥圃) 정탁(鄭琢)에게 상서(尙書)를 배웠다. 사천의 구암(龜巖) 이정(李禎)은 18세 때 부사를 보고 나라의 인재가 될 것이라 기대하며 근사록(近思錄)&rsquo을 주면서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 힘쓰게 했다. 23세 땐 진주 관찰사가 유생 10여명을 뽑아 지리산 단속사에서 공부를 시켰는데, 성여신이 그 중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연이어 6년을 시묘살이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고, 31세 때 덕천서원(德川書院) 건립을 도왔다. 36세 땐 처가가 있는 의령 가례로 이사해 곽재우 등과 교유하며 자굴산에서 학문을 연마하기도 했다. 정유재란 땐 둘째 아들과 함께 곽재우가 이끄는 화왕산성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54세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사정과 반구정(伴鷗亭)을 지었다.
성여신 선생은 이때부터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황폐해진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향약을 실시했다. 예를 복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 된 것이다.
성 선생 64세 때엔 가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선발을 주관하는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는데, 월사는 "집밖으로 서너 걸음도 나가지도 않았는데 강산 천만리가 다 보이네"라는 부사의 글을 읽고 노련하고 숙련된 선비로서 시속의 풍격을 본받지 않는 자라고 여겨 발탁했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4년 뒤 별시 동당에 장원한 성 선생이 서울에 가는 길이었는데, 객사 관인이 부사에게 정당한 방법이 아닌 쉽게 급제하는 방법을 이야기하자 '임금을 섬기려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은가? 내가 과업을 늙도록 폐하지 않은 것은 어버이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평소 포부를 한번 펴 보고자 한 것인데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세도를 알겠구나. 하물며 시사가 바르지 못하고 삼강(三綱)이 장차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데, 과거는 해서 무엇하리요'하고는 그만 돌아왔다. 그 후 은둔할 것을 결심하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산수 유람을 즐거움으로 삼았는데, 특히 두류산(지리산)을 유람하길 좋아해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