昌寧 孝子洞 孝巖齋의 八百年 史蹟
名譽會長 淸隱 成 大 基
一. 緖言(머릿말)
유원(悠遠)하게도 먼 옛날 찬란한 민족사(民族史)의 정화(精華)를 이루었던 신라(新羅)의 천년 사직(社稷)이 쇠망(衰亡)하면서(紀元前 57년~917년) 고려(高麗) 왕조(王朝)가 등극(登極)하여 중앙집권(中央集權) 통치(統治)제도는 강력한 지방 통치로서 향직제(鄕職制)로 그 지방의 토호(土豪)의 세도가(勢道家)로 군림(君臨)하는 호족(豪族)에게 호장(戶長)의 직책으로 임용(任用)하여 백성(百姓)을 다스렸다. 즉, 장민자는 호장이라 하였고 (掌民者 謂之 戶長), 장병자는 장교라 하였다 (掌兵者 謂之 將校).
二. 우리의 창성(創姓)
고려 중엽(中葉) (서기 1200년 무렵, 南宋 과거제도 도입 등) 창녕지방을 할거(割據) 군림하던 토호(土豪)인 호족(豪族)으로서 호장(戶長)의 향직으로 등용되어 창녕(昌寧)지방을 다스리신 成仁輔 戶長(성인보 호장)은 바로 중윤호장(中尹戶長)공이요 창성(創姓)하신 昌寧 成氏의 시조(始祖)이시다.
三. 시중공(侍中公)의 출천지 대효(大孝)
二世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의 휘; 松國이오, 시조 중윤호장공(中尹戶長公) 成仁輔의 독자(獨子)이시다.
1. 시조 중윤공(中尹公)께서 하례(賀禮) 인사차 송경(松京) 조정(朝廷)에 가셨다가 환후(患候)로 장서(長逝)하셨다. 상제(喪制) 시중공께서는 애절애훼(哀切哀毁)하시며 작지친부(作枝親負)하시고 창녕으로 천리부시(千里負屍) 곡림예장(哭臨禮葬)하신 천하대효(天下大孝)이시다. (千里負屍圖 참조)
2. 시중공(휘; 松國)께서는 아들 형제분을 두셨다. 장백(長伯)에 휘; 公弼은 추봉 봉익대부 판도판서이시고, 차자(次子)에 휘; 漢弼은 도첨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이시다.
① 三世 형제공에서 二大源流로 파종(派宗)을 이뤘다.
형 판서공(휘; 公弼)은 판서공파(判書公派)의 派祖이시며, 아우 찬성공(휘; 漢弼)은 찬성공파(贊成公派)의 派祖이시다.
3. 찬성공파 종중(贊成公派 宗中)의 도약상
三世 찬성공(휘; 漢弼)께서 아들 형제공을 두셨다. 장백(長伯)에 휘; 君百은 문하평리(門下評理)요 차자(次子)의 휘는 君補이요 관직은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평리이시다.
① 찬성공파 종중은 七萬여 자손들의 번성으로 곳곳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니 창녕, 영천, 진주, 의령, 거창, 봉화, 영주, 성주, 나주, 고창, 상주, 예산, 영동, 아산 등지로 단락과 번성을 이루고 있다.
② 찬성공파 종회(贊成公派 宗會)는 매년 3월에 정기총회를 삼파(평리공, 검교공, 지사공) 윤번제로 개최하면서 지역으로 순회하며 형형제제(兄兄弟弟) 친숙의 형제지의(兄弟之義)를 드높이며 친목을 거듭하고 있다.
2015년도 제31차 정기총회(定期總會)는 찬성공 파종회(派宗會)의 본부 창녕 효암재에서 개최할 예정이기도 하다.
四. 효자동 효암재의 서운(瑞雲)
유서(由緖)깊은 효자동 효암재(孝巖齎)는 창녕군 유어면 큰소재미길 69에 소재(所在)해 있으며, 고려 문하시랑 우문관 태학사이신 成履 부군의 묘역 성지로서 분암(墳菴) 종당(宗堂) 효암재는 칠백여년의 씨족 파종사의 요람(搖籃)연원지로서 무한의 사관훈작(仕官勳爵)의 사적과 사행공적이 쌓이고 묻힌 성지로 효손(孝孫)들의 끊임없는 성호의 답지(遝至)로 번성(蕃盛)과 발전을 거듭 이루고 있다.
1. 유구(悠久)한 시공(時空)을 거치면서 쌓이고 쌓인 七百餘年!! 고려 고종(高宗) 원종(元宗) 양 조정을 이어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신 시랑공(侍郞公)께서 환후로 서거하셨다.
① 상제(喪制) 형제공(휘; 甲臣, 乙臣)께서 애절애훼(哀切哀毁) 하시며 상재지향(桑梓之鄕) 이곳 효자암 산 침유원(枕酉原)에 곡림예장(哭臨禮葬)하시고 려묘궤전(廬墓饋奠)으로 곡벽애훼(哭澼哀毁) 하신 대효(大孝)를 이뤘다.
② 천파만파(千波萬波)로 려묘대효로 천양(闡揚)되어 작설지전(綽楔之典)의 정려(旌閭) 내려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으며 선대조의 무수한 사행공적 등 려묘용천지(廬墓湧泉址) 등의 사적이 쌓여 살아 숨쉬고 있는 효자동(孝子洞)의 성지(聖地)이다.[著文獻 : 昌寧縣誌, 遊漁面誌, 與地勝覽, 韓國地理誌, 淵源錄]
③ 효자동은 六代十二位의 선대조(先代祖)의 묘역(墓域)성지를 이루고 있으니 四世 고려 광정대부 문하평리공 휘; 君百 부군으로부터 고려 충신 판도판서공 휘; 만용(萬庸) 부군의 아들 四兄弟公 九世에 휘; 蹊, 踁, 路, 之傑 부군에 이르는 六代十二位우의 선영(先塋) 묘역을 모시고 있는 성지(聖地)로서 역대 선대조께서의 사행공훈(事行功勳)에 쌓이고 쌓여 요동치는 사적(史蹟)의 요람지이다.
五. 종당(宗堂) 효암재의 중건(重建)
창녕 효자동(孝子洞)은 고매하신 고려 문하시랑(門下侍郞) 우문관(右文館)태학사(太學士) 시랑공 선조님을 비롯하신 사환가(仕宦家)의 문중으로서 역대 선대조의 사관훈작(仕官勳爵)과 사행공적(事行功績)이 쌓이고 묻힌 요람성지(搖籃聖地)로서 종당(宗堂) 효암재(孝巖齋)는 五萬여 자손들의 충정(衷情)과 정성의 안식처로서 형형제제(兄兄弟弟) 상의처(相依處)로 서로가 의지하고 친화친숙으로 번성과 지향적 도약을 거듭하고 있다.
1. 유원히도 먼 옛날 흥망성쇠와 변혁(變革)등을 겪으면서 고려대국의 쇠망(衰亡)과 임진(壬辰), 정유(丁酉)의 전란 등으로 환산(渙散)하였던 시공(時空)을 겪은 후 조선조(朝鮮朝) 十九代 숙종 34년 무자년(戊子年)에 시랑공 부군(府君)의 묘역(墓域)을 다시 봉축(封築)하고 이듬해 1709년에 분암(墳庵)으로 제사(齊舍)를 창건(創建) [정당 4칸, 랑사 3칸, 외삼분 3칸)하여 백원당(百源堂)으로 편액(扁額)하였다.
2. 창건(創建) 87년후 정조(正祖) 20년(1796년)에 다시 중수(重修)하였으며, 106년후 태사왕 광무(光武) 6년(1902년)에 지리학적으로 자선 번성의 길지(吉地)란 이곳(건너편)으로 이건(移建)하였다.
3. 세구연심(歲久年深)하여 삼백여년이 지낸 체목(體木)이라 노후(老朽) 훼손(毁損)되어 중건(重建)의 불가피성(不可避性)과 정원(庭園)의 극히 협소 등으로 몇 차례 협의공론을 거듭하였으며 1988년 4월 정기총회에서 난산공론 끝에 중건(重建)의 대역사(大役事를 만장일치로 의결하게 이르렀다.
4. 희(嘻)라!! 기쁘도다 전 자손들의 총의의 뜻과 저력의 정성이 한 곳에 뭉쳤음이로다. 경덕사(景德祠)를 창건하여 시랑공 선조님의 혼령 위패를 모시기로 하였으며, 효암재(孝巖齋) 종당을 큰 규모(規模)를 이룰 계획과 설계를 완성하여 경덕사(景德祠) 및 효암재중건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발족하였다.
5. 대역사(大役事)의 착공 : 五萬여 자손들의 만장의 결의로 재원, 설계 등의 대 사업계획에 따른 추진위원회의 발족으로 공사경쟁 입찰에 의한 계약이 체결되어 1988.10. 3자로 준엄한 대 공사를 착공하였다.
6. 추진위원회의 전 임원은 물론이거니와 전 자손들의 한결같은 충정은 손에 손잡고 전 자손 일일 부역 등으로 혼연일체가 되어 일사천리로 공기(工期)내에 총 규모 9동 30칸의 대역(大役)의 공사 준공(竣工)으로 고역도 괴로움도 기쁨으로 승화를 이루었으니 저손 만대에 이을 장엄한 대 전당을 이뤘도다.
7. 장하도다! 우리의 정성으로 우리의 저력으로 우리의 뜻이 이뤄졌도다. 그 규모 도한 웅장(雄壯)하도다.
① 경덕사(사당) 3칸 ② 유도문(대문) 3칸 ③ 효암재(정당) 6칸
④ 동현(행랑) 3칸 ⑤ 서현(행랑) 3칸 ⑥ 일원문(대문) 3칸
⑦ 부속건물(화장실) 2칸 ⑧ 관리사(정침) 4칸 ⑨ 행랑(대문) 3칸
총 9동 30칸 총부지 1,600평 220m의 자연석 둘레의 돌담장, "永世淸風"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20尺 명시(銘詩)의 대자연석 장대비 준공기념대비 등 전 규모와 그 웅장한 경관은 그야말로 일필난기(一筆難記)요 구불가형언(不可形言)이라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도다. 장하기도 하여라...
8. 대망(待望)의 준공(竣工)낙성식 교유제(告由祭)는 숙원의 대 역사를 이룩한 준공의 고유제와 낙성식이라 (1989.11.26.) 지역사회에서는 초유(初有)의 대행사로서 고을 대 잔취를 이뤘으니 1,400여 인파(人波)로 준공 고유와 경과보고 등에 이어 풍악가무(風樂歌舞)의 여흥(餘興)놀이와 행운(幸運)찾기 경품놀이 등의 한마당 잔치로 효자동(孝子洞) 고을에 메아리쳤으니 씨족사(氏族史)에 길이 빛날 대 경사(慶事)이기도 하였다(CD참조)
六. 경관조성(景觀造成)과 사적(史蹟) 복원(復元)
효암재 중건 대 사업(九棟 三十間칸)을 준공 성필(成畢)한 후 경관조성 사업과 사적발굴 복원 사업 등을 쉴새없이 전개하였다.
1. 조경 경관 사업으로 효암재 경덕사 경내 주변의 화단(花壇) 등에 고급 사철수목 등을 식재하였으며, 외곽(外廓)담장 밖 둘레 앞마당 등에는 벚꽃나무 70그루를 식재하였다.
① 20년이 지난 현재는 봄철이면 벚꽃이 만발하여 관광명소를 방불케 하여 장관을 이루니 보는 이들도 찾으며 매년 4월 둘째 일요일(定日) 경덕사(시랑공 선조와 효자 충신을 배향) 춘향대제날은 축제의 성화를 이루고 있다
2. 사적 복원시설 등으로 효암재 사적대비 건립으로 칠백여년의 씨족사의 근간(根幹)을 편저하여 원류를 회상(回想)케 하였으며 20척의 “永世淸風”의 명시(銘詩)의 자연석 대비는 융성발전을 기원하도다.
3. 지반(地盤)의 구거시설(溝渠施設)을 완성하여 건물의 유지관리의 대역사를 이룩하였다. 효암재 종당의 방향이 북향(北向)이라 겨울의 凍結, 봄의 解氷 등으로 건물의 지반 유지상 침해의 극심함을 방지하는 대역(大役)의 공사는 65개(U자형 독광, 너비50cmx깊이cmx길이6척)의 배수 독광을 건물 주위에 매설하였으며, 건물 둘레, 정원(마당) 등에는 포장공사로 유지관리에 만전을 기하였으니 다행한 일이로다.
4. 효자동 효자정려문의 복원 :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때에 세워진 효자정문(孝子旌門의 복원으로 만 효손들의 숙원지 대망사를 이룩하였다
① 고려 문하시랑 우문관태학사(휘; 履) 부군의 아들 형제공(휘; 甲臣, 乙臣)이 출천지(出天至) 대효(大孝)로 천양(闡揚)되어 작설지전(綽楔之典)의 정려(旌閭)내려 세워진 효자정려문(孝子旌閭門)을 복원하였다.
② 효손(孝孫)들의 끊임없는 집념(執念)의 숙원(宿願)지 대사는 정부의 문화재 재원으로 영구 스텐재로 복원하였으며, 먼 옛날 당초 세워졌던 곳은 농로(農路)로 변하여서 종당 효암재 외삼문(一源門)앞 외정(外庭)에 세워 복원(復元) 고유제는 만 자손들의 훼모(毁慕)의 정(情)을 회상(回想)케 하였으며 사적 제4호의 사적비 세워서 후세에 기리도록 하였다(文獻 : 昌寧縣誌․地理誌․與地勝覽)
七. 종중 봉선문묘 창건과 운영
봉선문묘(奉先門廟)는 우리 문중(門中)의 선대(先代) 조부모와 자손들의 혼령(유해) 위패(신주)를 받들어 모시는 종중 사당(祠堂)이다.
즉, 사당(祠堂)은 우리 문중 집안의 자손들을 사후(死後)에도 혼령(魂靈)을 편안하게 영생영락토록 모시는 사당으로 쾌적한 문묘(門廟)를 정부시책으로 개정(改定)된 법률에 의하여 창건한 종중의 사당이다.
1. 시대는 산업화, 세계화, 다문화적(多文化的), 핵가족(核家族)시대로 발전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부에서는 장묘문화(葬墓文化)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산(山)에 시체를 묻는 매장을 못하게 법령이 변경되어 화장(火葬)하여 납골시설(納骨施設)에 유해(遺骸)를 봉안하도록 개정(改定)하였다.
2. 개정된 법령에 따라 각 시군(市郡)에서는 납골당(納骨堂) 영락원(永樂園)을 건립하여 화장한 유해(遺骸)를 봉안(奉安)하고 있으며 철저한 행정조치로 보존기한은 15년 시한부이다.
3. 우리 종중은 정부에서 개정된 장사(葬事)에 관한 법률(法律)제14조제3항, 동 시행령(施行令)제13조제1항, 별표(別表)제2호의 사설(私設)문중(門中)납골시설(納骨施設) 설치기준령(設置基準令)에 의하여 문중 문묘(門廟)를 창설하여 우리 문중 자손에 한하여 선대 조부모(祖父母)님과 같이 위패(位牌)의 유해(遺骸)를 봉안할 수 있는 쾌적한 순 고강도 석재 문묘를 창설(創設)하여 영구(永久)이 모시고 있다.
-희(嘻)라!! 기쁠 일이로다, 시대가 바뀌고 달라지면 사람의 생각도 바뀌고 마음도 달라져야 한다. 집안 종중을 다스리는 종사 운영면도 바뀌어져야 하고 달라져야 하는 법, 다행히도 우리 종중은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시대의 변천과 발전에 따라 미래지향적으로 임원들의 중의(衆意)를 모아 대견하게도 후세를 위하여 종중의 발전을 위한 큰 틀을 이룩하였으니 백년대계를 위한 번영을 기약함이로다.
4. 문묘창설의 특수성 : 문묘(門廟) 창설을 위하여 몇 년간의 종론(宗論)과 부지선정(敷地選定) 및 조성(造成), 규모의 설계, 최신의 기공법, 석재의 선정 및 강도측정(强度測定), 기술적 전공업체 선택 등의 제반조건을 연구(硏究) 실사(實事)를 거쳐서 백년대계의 종론과 취향(趣向) 규모 등 완벽한 자원 염출(捻出)의 계획을 수립한 후 정부 당국의 허가를 득하여 착공에 이르렀다.
① 총 부지 400평 조성, 60평의 택지구축, 순고강도(95%) 석재건(石材建)으로 1,400위(位)의 특수설계에 의한 영부실(靈府室) 구조로 건립(建立)하여 내부시설의 환풍, 제습, 조명시설 등의 상시 가동과 부부내외분 1室 봉안의 특수성으로 東軒(동헌), 西軒, 南軒, 北軒, 中南軒, 中北軒별로 개폐문의 미다지식 특수설계로 쾌적한 독립성을 구성하였다.
② 외곽시설의 편의성 : 영부실 사방의 석재장식형 시설의 구축과 석등(石燈) 제향시설대의 만취 행사시설의 잔디 광장, 300여평의 주차장, 휴식공간 2동의 기와 정자(亭子)옥, 사무건, 화장실건, 5척의 조상 숭모비, 9척의 문묘입구 표지비, 문묘에 대한 사적을 기록한 사적 7호비, 봉안한 조부모님의 사행공적 등의 묘비(墓碑), 공적비를 세울 수 있는 비단(碑壇)시설(20개 건립) 등을 가추고 있다.
③ 조경(造景)시설로 쾌적화 : 영부실 화단과 주차장 갓변의 사철수 식재로 쾌적을 이루며, 둘레 180m의 원장 철제 휀스시설과 주위 둘레에 50그루의 벚꽃나무식재로 봄철이면 벚꽃의 만발로 관광지를 방불케할 절경(絶景)을 이루고있다.
5. 사당(廟)에 혼령 위패(位牌)를 모시는 역사적 배경
사람의 사후에 묘(墓)를 조성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의 옛 풍습(風習)이다. 묘(墓)는 단지 시체(屍體)를 감추기 위한 방법이며 땅을 파서 헐고 시체를 묻고 표시가 나타나게 한 것이 봉균(墓)이다.
① 먼 옛날 고려(高麗) 왕국(王國)시대부터 국가에 종묘(宗廟)를 창설(創設)하여 역대 임금의 혼령 위패(神位)를 봉안하고 매년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종묘대제(宗廟大祭)를 모셨고 천여년이 지난 지금에 고려대전(高麗大殿)을 창건하여 고려 34왕과 충신각(忠臣閣)에는 고려 충신을 배향하고 매년 10월에 천여 후손들이 경기도 파주소재 고려대전(高麗大殿)에서 대제를 모시고 있다.
② 옛날부터 나라의 임금은 종묘(宗廟)에, 대학자(大學者)는 문묘(文廟)에, 저명한 석학(碩學) 유현(儒賢)은 서원(書院)에 혼령 위패를 모시고 춘추대제를 지금도 모시고 있으며,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도 집안에 가묘(家廟)를 설치하여 사대(四代) 조부모의 혼령위패(神位)를 봉안하여 정성 것 제향을 드리우고 있음은 자식된 도리의 천륜지의(天倫至義)를 다하는 충정의 도리일 것이다.
6. 종중 문묘 봉안의 특혜사항
정부시책에 따른 시, 군 지자체에서 납골당 영락원을 건립한 곳과 개인 시설사업체에서 건립한 납골원은 봉안제도가 15년을 기한부로 만기되면 퇴출하여 자손들이 임의 처리하는 기한부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① 종중 봉선문묘는 영구 영락제도이며 우리 종중(집안)의 자손에 한하여 영구 봉안할 수 있는 제도를 부부내외분이 일실(一室)에 봉안하여 부부간 의좋게 영생영락할 수 있는 특수설계로 자손 위주의 특혜로 영구 제향까지 모시고 있다.
7. 봉안의 절차 : 우리 종중(집안)의 자손에 한하여 누구나 선착순으로 청약(請約)하여 두면 언제든지 유해(遺骸) 위패(位牌)를 모실 수 있는 특혜를 가지며 영구제향비 십만원을 납입하면 영구히 종중에서 제수(祭需)를 차려서 제향(祭享)을 모셔주는 특혜를 부여하고 있다.
참고사항 : 청약절차 등의 문의처
① 총무처 : 전화번호(055-532-7881)로 상시 접수
② 제향대제일 : 매년 음력 10월 초2일 합동대제 봉향
③ 상시 성묘(省廟) 할 수 있으며 문묘 입구 자바레 문열쇠는 7788 번호제이라 상시개폐의 편의를 제공하여 자유로이 성묘(省墓)할 수 있으며,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八. 효자동의 사적 보전과 선양(宣揚) 관리
유구한 시공을 겪으면서 칠백여년래의 전통적 조상 유업을 겸허하게 이어 받아 승화보전(昇華保全) 과 더불어 발굴(發掘)하여 조명현창(照明顯彰) 등으로 간단(間斷)없이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선대조(先代祖)의 거룩하신 전통적 사적 등의 내력사(來歷史) 등을 현장을 돌아보는 자손들로 하여금 보면서 사적 등을 알도록 간락하게 나마 기록한 사적비(史蹟碑)를 세워두어 보고 알면서 느끼도록 하였다.
이렇게들 전통적 선대 조부모님의 거룩하신 유업을 자손들이 보고 알도록 시대적 감각에 적응하도록 볼거리 사업에의 한 몫으로 자손들의 시대정서에 걸 맞는 종사를 개진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1. 사적(史蹟)의 내력사에 따른 사적(史蹟)을 순위별로 지정(指定)하여 보전관리에 적정을 기하기 위하여 7개소의 사적을 순위별로 지정(指定)하였다.
2. 각 지정된 사적을 순위별로 지정 번호를 부하여 사적의 내력사를 사적비(史蹟碑)에 새겨서 현장에 세워서 보고 알면서 거룩하신 조상님을 공덕을 회상(回想)하면서 기리도록 하였다.
① 현장에 세워진 사적비의 현황
史蹟 第1號 : 고려 문하 시랑공 선조 묘역과 내력사
史蹟 第2號 : 종당 효암재의 중창건과 내력사
史蹟 第3號 : 경덕사의 창건사와 선조배향의 내력사
史蹟 第4號 : 효자동 효자 정려문의 복원과 내력사
史蹟 第5號 : 선대조 7위의 봉안 석실과 내력사
史蹟 第6號 : 사형제공의 묘역과 내력사
史蹟 第7號 : 종중 봉선 문묘의 창설과 전통적 내력사
② 사적지 제1호부터 제7호까지의 사적지를 안내하는 사적지(史蹟地) 안내비(案內碑) 효암재 입구 주차장 제1사적지 안내비와 제2사적지 안내비를 세워서 누구나 보고 알도록 안내하고 있다.
제1지역 안내비 : 제1, 5, 6, 7호 사적비가 세워져 있는 장소 안내
제2지역 안내비 : 제2, 3, 4호 사적비가 세워져 있는 곳 안내
3. 사적비(史蹟碑) 문안(文案)
史蹟 第 一 號
高麗 門下侍郞公 成 履의 聖地
一. 侍郞公의 出生
侍郞公은 北宋理宗元年 高麗 二十三代 高宗 十二年 本鄕世第에서 高麗 都僉議 門下贊成事 三世 成漢弼의 長孫으로 四世 匡靖大夫 門下評理 成君百의 獨子로 出生하셨다. 上祖 高麗 中尹戶長 始祖 成仁輔의 玄孫이요, 二世 高麗門下侍中 成松國의 曾孫子이다.
始祖 成仁輔는 昌寧地域을 中心으로 割據 君臨하던 土豪인 豪族으로서 百姓을 統治한 掌民者이신 中尹戶長이시다.
二. 侍郞公의 逝去
五世 侍郞公은 高麗高宗 元宗 兩朝에 政丞인 從一品 門下侍郞 右文館 太學士등 高位官爵을 歷任中 患候로 不幸히도 長逝하셨다.
喪制 評理公 휘 甲臣, 侍中公 휘 乙臣 兄弟公은 泣血哀毁하시며 葬禮를 桑榨之 本鄕 南 遊漁村 이곳 先山 枕酉原名堂에 哭臨禮葬하셨다.(配位 昇平郡夫人 張氏 合祔)
三. 孝子洞 孝子門谷으로 命名化
喪制 兄弟公은 哀切哀痛으로 廬墓三年 朝夕上食祭의 哭擗泣血로 哀毁함이 禮를 넘었으니 饋奠哭聲은 鄕外로 傳播되었으며 神明이 感應하여 우물에 淸水湧出 하니 土人들은 因稱天下大孝의 所致라하였다. 이山은 孝子山 소자메라 하고 洞里를 孝子洞 큰소자메로 菴子를 지었으니 孝子菴山 綽楔之典 孝子旌閭내려 忠烈王 乙巳年에 旌門 세웠고 孝子門谷 등으로 傳史傳으로 命名化되어 昌寧縣誌 輿地勝覽 地理誌 등에 登載編著 되었으니 千波萬波로 朝廷에 闡揚케되어 옛廬墓 湧泉址는 지금도 生生히 그 情況을 비추고 있다.
四. 墓域 聖域化
歲久年深하여 墓碑 風磨刓決로 本文移載 改碣하고 文人石등 石儀物 淨化 墓域擴張聖域化로 千萬歲 永守之地로 孝孫으로서 衷情과 報本의 義를 다할지어다.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千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六世 門下評理(휘: 甲臣)公
二十一世孫 成 仁 杓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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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蹟 第 二 號
宗堂 孝巖齋의 重建
一. 孝巖齋의 淵源史
孝巖齋는 高麗門下侍郞公 五世 成履 府君의 墳庵이오 齋閣宗堂이다. 侍郞公께서 逝去하사 桑榨之本鄕 이곳 先山枕酉原에 哭臨禮葬後 한때 香火가 끊어졌으니 壬,․ 丁戰亂으로 渙散하였던 變革이라. 戊午年 外孫 洪萬朝 嶺南監司가 이곳 巡過시 異變徵兆로 巡卒探索하여 階築을 헐고 誌石찾아 다시 封築하였으니 幸事로다. 純祖 乙丑年 百源堂 創建하고 哲宗 丙辰年에 修築하여 光武壬寅年에 이곳으로 移建 孝巖齋라 扁額하였다.
二. 孝巖齋의 重建과 祠宇創建
創舍 近二百年 體木老朽毁損되어 乙丑 十月에 重建大事를 齊發決議하고 宗論糾合上 侍中公 宗中派譜를 編纂하고 戊午年 八月 에 起工하였다. 祠宇三間 神三門 三間 正堂 六間東軒 三間 西軒 三間 便所建 二間 管理舍 四間 廊舍 三間 총 九棟 三十間 大役事를 己巳年 八月에 竣工하여 同年 十一月에 竣工式에 千三百餘 子孫들의 祝賀人波로 大 盛況을 이뤘다.
三. 孝巖齋의 跳躍과 運營面의 先進化
孝巖齋 重建으로 一九九十년 四月 管理運營會構成 規約을 制定 初代會長, 任員選出하였다. 環境造成 獻樹事業,贊成公派世譜 侍郞公宗中 淵源錄,孝巖齋誌등을 出刊하였으며, 泯沒된 史蹟發掘照明등으로 孝子旌閭門의 復元 奉先門廟 創設 宗堂境內 溝渠施設完工 孝巖齋事蹟碑 建立등 宗堂의 堅實化에 寄與하였으며 宗堂運營面에 燦然한 曙光으로 啓進을 거듭하고 있다.
四. 史蹟觀 定立事業은 先進化의 捷徑
孝子洞 史蹟高揚啓導事業으로 史蹟을 第一號乃至 第七號로 選定弘報啓進次元에서 史蹟碑세워 觀光精神醇化에 寄與케 하여 運營面의 內實을 堅固히 다짐은 先進化發展에의 捷徑이라 다같이 精誠껏 宗堂發展에 自進함이 나를 있게 한 義요 道理 일 것이다.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千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六世 檢校侍中公(휘: 乙臣)門中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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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蹟 第 三號
景德祠 創建과 先代祖의 配享
一. 祠宇의 創建
祠宇 景德祠는 高麗門下侍郞 五世 휘 履府君의 神位를 主僻으로 配享한 祠宇이다. 侍郞公은 高麗高宗 元宗兩朝에 高位官爵을 두루歷任하셨으며 逝去하시자 이곳 本鄕 先山에 哭臨禮葬하여 喪制 門下評理 휘 甲臣 門下侍中 휘 乙臣 兄弟公의 廬墓三年의 天下大孝로 인한 綽楔之典의 孝子旌閭로 旌門을 세웠으니 孝子門谷으로 自然 發祥的으로 命名化되어 昌寧縣誌등에 編著되어 當時의 史實을 世人으로 하여금 感應케 하였다. 戊辰 十月에 祠宇創建 孝巖齋 重建工事를 着工하여 己巳年 八月 竣工으로 祠宇三間을 景德祠로 神三門 三間을 由道門으로 扁額하였다.
二. 侍郞公 先祖 立祠配享 및 追配
庚午年 四月 高邁하신 侍郞公 成先生 位牌 配享立祠告由祭에 二百餘 子孫들의 參禮裡에 精誠을 다하였다.
辛巳年 四月 春享大祭를 期하여 侍郞公의 曾孫이신 八世高麗忠臣版圖判書公 휘 萬庸府君의 追配 立祠告由祭를 모셨다. 己丑年 四月 春享大祭時에 朝廷에서 綽楔之典의 孝子旌閭를 받으신 評理公 휘甲臣府君과 門下侍中公 휘 乙臣府君 兄弟公의 追配 立祠告由祭를 모셨고 癸巳年 四月 春享大祭를 期하여 八世 高麗忠臣 版圖判書公 휘 仲庸府君의 追配立祠 告由祭를 모셨다. 侍郞公의 曾孫子 이시다.
三. 景德祠 配享位 序次
五世 侍郞公 成先生은 中央位에 主僻으로 모시고 六世 評理公 成先生 六世 侍中公 成先生은 左側配列位로 八世 判書公 成先生 八世 判書公 成先生을 右側配位에 모시고 每年 四月 둘째 日曜日 定日로 春享大祭時에는 八十餘 子孫들의 參禮裡에 享祀를 드리고 있으니 많은 後孫들의 誠孝가 날로 蕃盛하길 바람이로다.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千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十五世 芙容堂 成安義 先生門中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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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蹟 第 四 號
孝子 旌閭門의 復元
一. 孝의 根源과 意義
孝는 百行之源이라. 사람마다 잘 알고 있으나 實行하기 힘들고 착하고 어진마음은 하늘이 주었건만 간직한 사람 드물기도 하다.
어질고 착한 자에게는 옛 부터 나라에서 表彰하는 綽楔之典의 旌閭를 내려서 世人들로 綱常의 根本으로 기리도록 하였다.
二. 毁慕의 旌閭
五世 侍郞公 휘 履 府君께서는 高麗高宗元宗의 兩朝에 高位官職을 두루 歷任하시다가 逝去하셨다. 喪制 評理 휘 甲臣, 侍中 휘 乙臣 兄弟公은 哀切哀毁하시며 本鄕 先山 이곳에 哭臨禮葬하시고 廬墓三年의 饋奠毁慕之 大孝로 闡揚되어 旌閭내려 旌門을 세워 기렸으니 世人의 龜鑑이로다.
三. 孝子旌閭門의 復元
高麗의 衰亡 變革 壬辰,丁酉의 戰禍등 七百餘年의 時空과 渙散등으로 如意치 못하여 修裝도 못하고 腐蝕 泯沒되었으니 慨嘆之事이라 數年前부터 復元事가 齊發되었고 時代的으로 腐蝕材를 止揚永久 復元키로 推進中 戊子 四月 議總에서 着手키로 議決되었다. 모든 事業計劃을 作成 行政當局에 復元協助文을 進達하였고 遊漁面을 經由 昌寧郡을 訪問 復元事를 相論 文化財源으로 復元하여 줄 것을 要請하였다. 以後 受諾決定으로 文化財 指定設計士 建設業者에 依하여 同年 七月 스텐리스 鐵製로 永久不滅의 孝子旌閭門을 昌寧郡 文化財豫算으로 復元建立 하였다.
四. 復元 竣工 告由祭 盛了
嘻라 萬子孫들의 宿願의 旌門을 行政當局의 配慮로 復元竣工 되었으니 毁慕의 情을 回生케 하였도다. 百餘 子孫들의 誠孝裡에 祝典盛了를 이뤘으며 永世燦然히 빛나도록 祝願하였도다. 蒼天星斗처럼 永遠할 것이니라.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天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十五世 浮査 成汝信 先生門中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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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祭壇 創設의 意義
高麗衰亡 變革과 壬辰 丁酉戰亂등으로 子孫들은 渙散하였으니 先塋守護 管理를 이루지 못하여 香火가 끊어졌으며 先塋조차 失傳泯沒 되었으니 찾을 길 無所考이로다. 世上에 或들 先塋을 잃고 祭壇하여 祭享을 모시는 것이 子孫된 禮로서 至極한 義理에 合當한 道理라 할 것이다.
二. 祭壇 創設로 神位奉安
우리上祖에 七位의 先塋을 失傳하였으니 이제 祭壇을 封築하여 祭享을 드리우고자 己未 一九七十年 四月 總會에서 祭壇을 封築키로 決議하고 推進에 이르렀다. 庚申年에 花岡石 純石材 地上建石室을 構築하여 四世 高麗 匡靖大夫 門下評理公 휘 君百府君을 비롯 六世 門下評理公 휘 甲臣府君 아들 七世 秘書省 秘書監 휘 禧府君 孫子 八世 處士公 휘 若庸府君으로 三代三位와 六世에 門下侍中公 휘 乙臣府君 아들 七世에 都僉議 門下贊成事 集賢殿 太學士 휘 士弘府君 孫子 八世 奉翊大夫 版圖判書 寶文閣 太學士 휘 萬庸府君으로 三代三位에 이른 四世 七位府君의 祭壇 石室을 封築創設하여 神位를 奉安하였다.
三. 石室奉安의 次序와 祭壇碑 建立
石室 神位奉安으로 序位는 中央位에 匡靖大夫 門下評理公 휘 君百府君을 主僻으로 左側 序位에 六世 評理公 七世 秘書監公 八世 處士公 三代三位로 右側 序位에 六世 侍中公 七世 贊成公 八世 判書公 三代三位 序位로 奉安하였다. 外廓 右側에 高麗 匡靖大夫 門下評理公 昌寧成氏 君百之 祭壇碑 柎 孫.曾.玄 三世 七位의 祭壇碑세워 歲歲年年 每陰曆 十月初二日 定日로 百餘 子孫들의 參禮裡에 誠孝를 다하고 있으니 後孫들은 祖孫의 義와 道理를 다하여야 할 것이니라.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千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九世 少尹公 휘 路 十六世孫 成 漢 郁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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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蹟碑 第 六號
九世 兄弟四公 墓域造成
一. 墓域造成의 意義와 來歷史
高麗 五百年 社稷의 衰亡으로 因한 變革과 壬丁戰禍 등으로 子孫들은 渙散하였으니 先塋 守護管理를 못하는 時代를 겪으면서 不幸하게 先塋을 잃었으니 慨嘆之痛事이지 않으리오.
世上에 或들 先塋을 잃고 祭享을 드리지 못하는 子孫들의 哀恨으로 或들 祭壇으로 香火를 드리는가 하면 招魂葬으로 墳墓를 封築하여 祭享을 모시는 것도 禮와 義로서 道理일 것이라 하였으니 子孫으로서 先塋을 모시는 道理에 合當하지 않으리오.
우리 先代祖 八世 高麗 奉翊大夫 版圖判書 寶文閣 太學士 이신 成萬庸께서 高麗社稷의 國運이 기울어지자 王都에서 南下 亡僕節 하셨던 때라 公의 아들 四兄弟分의 先塋을 失傳하였도다.
二. 九世 兄弟 四公 墓域封築
九世 四兄弟 府君에 伯公의 휘는 蹊요 官職은 巨濟縣令이요 仲公의 휘는 踁이요 官은 中直大夫 行宜寧縣監이요 叔公의 휘는 路이요 官職은 軍器少尹이요 季公의 휘는 之傑이요 官은 密直이다.
時代의 變革등으로 先塋을 失傳하였으니 丙寅年 四月 宗議로 招魂葬으로 決議되어 施行 着工하였다. 高邁하신 侍郞公 府君 高祖考 墓階下에 墓域을 造成하여 伯公,仲公,叔公,季公 位次로 招魂位板을모시고 告由祭를 드려 成墳하여 石儀物 갖추고 封築하여 中央에 昌寧成氏 兄弟四公 墓道碑 建立하여 百餘 子孫들의 誠孝로 宿恨의 義를 다하였다.
嗚呼!嘻라!~~~ 先塋을 失傳하여 香火가 끊어진 지 몇 해인고? 祭壇하여 瞻掃封壇 三上香 드리우니 毁慕의 恨 이뤘도다. 우리는 이리하여 千萬世 子孫된 義를 잊지 말고 이어 誠孝를 다하여야 할 것이니라.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千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九世 少尹公 휘 路 十七世孫 成 英 吉 謹竪
(英 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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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蹟 第 七 號
宗中 門廟의 創設
一. 門廟創設의 時代的 意義
門廟는 門中의 祠堂이오. 사당은 혼령위패를 奉安하여 祭祀모시는 곳이다. 時代는 産業化, 世界化, 多文化的 核家族化 時代로 發展하면서 生業職場에 따라 어느 곳에서 生活할런지 예측 못하는 時代, 農耕時代와 같이 故鄕에 安住하여 祖父母산소 벌초 등을 守護管理 하던 옛 風習의 葬墓文化에 關한 法令이 改定되어 同施行令 第 十三條 第 一 項 別表二號에 依하여 門廟를 創設 祖父母, 先代祖의 혼령위패를 奉安하고 永久히 祭享을 드리우는 門廟를 創設 하였다.
二. 사당廟에 혼령位牌를 모시고 祭享드리우는 歷史的 根源
墓는 단지 外形的 標識이며 옛 高麗王國 時代부터 國家에 宗廟를 創設하여 歷代 임금의 혼령位牌를 奉安하고 每年 文武百官으로 宗廟大祭를 모셨다. 千年이 지난 至今에 다시 高麗大殿을 創設 歷代 三十四 王과 忠臣의 혼령위패를 奉安하고 千餘子孫들이 大祭를 모시고 있다. 나라의 大學者는 文廟에, 著名한 碩學은 書院에, 士大夫 집안은 家廟에 혼령위패를 配享하는 精誠은 天倫之 報本의 義이요, 時代性에 따른 崇祖敬親의 道를 다함이로다.
三. 神靈의 殿堂. 門廟奉安의 節次
門廟에 奉安入室의 請約은 효암재 事務處에서 先着順으로 接受 請約을 締結한다.
① 問議電話: 五三二~七八八一번, 팩스: 五三二~七八八三번
② 門廟의 規模: 高强度의 純石材 地上建 사당으로 夫婦合室制이며 換風, 除濕, 點燈施設의 快適한 施設로 常時 稼動되고 있으며 三百坪의 駐車場, 附帶施設을 갖추고 있다
四. 請約의 規範: 夫婦一室 請約 申請으로 永久祭享까지 宗中運營會에서 合同祭享을 드리고 있다.(陰曆 10月 初2日)
五. 文化財施設 昇格化보완
地方文化財 指定施設로 補完하면서 永世燦爛한 門廟로 昇華에 誠과 熱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千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十世 司諫公 六世孫 慕省齋公(휘:鏞)門中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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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蹟 第 一號 地域의 史蹟案內
一. 史蹟地의 來歷史
悠遠한 高麗時代 高麗 中尹戶長으로 地域을 統治하던 昌寧成氏 始祖(휘:仁輔) 中尹公의 次孫이요 高麗 門下贊成事(휘:漢弼)贊成公의 長子이신 匡靖大夫 門下評理公(휘:君百)으로부터 九世에 이른 先代祖上의 魂靈 墳墓를 모시고 있는 聖地인 地域이다.
二. 位置와
西쪽으로 約 五十m 앞 先山入口에 高麗門下侍郞公의 墓域 聖地의 標識 長大石碑로 案內하고 있다.
三. 追慕의 史蹟 聖地
史蹟 第 一號. 五號. 六號. 七號.에 이른 史蹟地로서 各各 史蹟碑에 옛 祖上님에 對한 追慕의 史蹟을 簡略하게나마 收錄하였으니 孝孫으로서 精誠껏 읽어보고 熟知하여 祖上님의 거룩하신 顯爵功勳에 報本의 衷情으로 받들어 守護永守之地로 昇華시겨야 할것이니라.
① 史蹟 第 一號: 五世 高麗門下侍郞(從一品) 右文館 太學士(휘:履)府君의 墓域으로서 喪制 兄弟公의 廬墓大孝로 綽楔之 旌閭를 나라에서 받으신 거룩한 靈地로서 史蹟이 生成하고 있는 聖域이다.
② 史蹟 第 五號: 四世 高麗 匡靖大夫門下評理(휘:君百)府君에서 八世 版圖判書(휘:萬庸)府君에 이른 四代 七位의 神位를 奉安한 純石築 石室 地上建의 壇域이다.
③ 史蹟 第 六號: 八世 高麗 版圖判書 寶文閣 太學士 高麗忠臣(휘:萬庸) 判書公의 아들(휘: 蹊, 踁, 路, 之傑) 四兄弟 府君의 墓域을 모시고 있다.
④ 史蹟 第 七號: 孝子菴山 奉先門廟는 우리 侍郞公宗中의 門中門廟로서 先代祖님에서 現世에 이른 혼령과 位牌를 모시고 宗中에서 永世 祭享을 모시는 唯一無二한 靈域이다.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千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九世 少尹公(휘:路) 八世孫
敬軒公(諱:南軫)門中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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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蹟 第 二號 地域의 史蹟案內
一. 史蹟地의 根源
昌寧成氏 三世 高麗 都僉議 門下贊成事(휘:漢弼)公의 長孫이신 高麗門下侍郞 右文館太學士(휘:履) 侍郞公의 墳庵 齋閣인 宗堂의 領域이다.
二. 位置 와 雄姿
四百坪의 現 駐車場은 孝巖齋 重建紀念 植樹木인 槐木나무와 植樹造景을 이룬 이곳에서 南쪽 方向에 드높게 자리잡은 一千二百坪에 九棟 三十間의 巨重한 建物 孝巖齋와 景德祠가 秀麗한 造景을 이룬 宗堂 全域이다.
三. 永世史蹟의 傳承
史蹟 第 二號. 三號. 四號는 七百餘年來의 氏族史에 길이 빛나는 先代祖上님의 事行勳蹟이 살아 숨 쉬는 史蹟地로서 各號에 따른 發展史를 各各 簡略하게 收錄하였으니 孝孫들은 탐독하여 아는것을 後世에 이어주어야 할것이다.
① 史蹟 第 二號: 宗堂 孝巖齋는 五世 高麗門下侍郞 右文館太學士(휘:履)府君의 墳庵齋閣인 宗堂이다.
九棟 三十間의 雄姿와 孝巖齋 史蹟碑. 二十尺의 永世淸風은 宗室의 永世昌盛을 祈願하는 銘詩와 秀麗한 造景을 이루고 있다.
② 史蹟 第 三號: 高邁하신 侍郞公(휘:履)府君을 비롯 天下大孝로 綽楔之典의 旌閭 받으신 孝子 兄弟公(휘:甲臣, 乙臣)府君과 高麗大殿 忠臣閣에 配享되신 高麗忠臣 兄弟公(휘:萬庸, 仲庸)府君을 配享한 祠宇 景德祠이다.
③ 史蹟 第 四號: 高麗 忠烈王때 綽楔之典 旌閭내려 세워진 天下大孝 評理公(휘:甲臣)과 侍中公(휘:乙臣) 兄弟府君의 孝子旌門이 歲久年深으로 腐蝕泯沒되어 當局의 文化財源으로 復元하였으니 後世 孝孫들은 天倫之 誠孝로 永守保全에 道理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孝巖齋 管理 運營會
西曆 二千十三年 十二月 日
昌寧成氏 侍郞公 宗中
八世 花泉府院君公(휘:大庸)門中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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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 昌寧成氏 侍郞公宗中 孝巖齋 管理運營會 名譽會長 淸隱 成 大 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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