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송현동 고분군
금세기 초까지만 해도 170기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30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 원래는 한 고분군을 이루고 있었으나 국도가 나면서 교동·송현동 고분군이라 따로 불리고 있다.
창녕군의 지세를 살펴보면 동쪽은 높은 산지로 막혀 있고 남쪽과 서쪽은 낙동강 본류가 휘감고 있어 오로지 북쪽만이 구조곡을 따라 대구 쪽으로 이어진다. 갑오개혁 직후 1895년에 실시된 지방 행정 구역 개편에서 조선 8도를 23부 337군 체제로 개편하였다. 경상도 역시 몇 개의 부로 나뉘었는데, 대구를 중심으로 대구부가 만들어졌다. 대구부는 23개의 군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영산군, 창녕군, 밀양군, 3군은 현재 경상남도에 속하는 것이다. 다음 해인 1896년에 23부가 13도로 바뀌면서 창녕군과 영산군이 창녕군으로 합쳐져 경상남도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창녕은 경남보다는 대구와 가깝다.
밀양(청도)으로 가는 24번(20번) 국도를 타고 시가지를 벗어나면 바로 교동고분군에 이른다. 이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고분군, 대구 달성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과 더불어 대표적인 가야 시대 고분군이다. 이들 고분군은 큰 도회지 인근에 있으며, 봉토분들은 야산의 능선을 따라 집단적으로 늘어서 있다. 고분군 뒤로 100~200m 높이의 구릉지가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높은 산지가 연속적으로 달리고 있다. 구릉지로 된 구조곡을 따라 낙동강이 지나며, 왼편 멀리 높은 산은 의령의 자굴산이다.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불사국으로, 고분군은 읍의 동쪽 목마산의 산록 송현동 구릉에서부터 읍의 북쪽 교리에 이르기까지 대소 70여 기의 고분들이 분포되어 있다. 이 지방의 고분들은 1918년 교동과 송현동의 일부 고분들이 발굴되어 많은 양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보고서도 나오지 않았고 유물의 일부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창녕군 교동 고분군 복원정비계획에 따라 1993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은 목마산 기슭의 고분군 중 5기를 발굴조사하고 보고서를 간행하였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횡구식 석실로 봉토는 작업구역을 분할하여 유사판축하면서 주변에 호석을 둘렀고 호석 바깥에는 판축시 사용된 주혈이 있다. 주혈 2~4개가 직선상을 띠는 것은 고분의 평면이 원이 아니고 다각형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분할되어 나타나는 작업구간과도 일치하고 있어서 주혈이 봉토작업과정과 유관함을 보여준다.
석실의 내부는 모두 횡구식으로 1·2·3호분은 입구에 묘도가 달린 것이며 3호분의 묘도는 610㎝나 된다. 석실은 완만한 경사면에 축조되고 반지하식과 지하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반지하식이 선행하는 것이다. 3호분은 토갱 내에 목곽의 기둥을 먼저 설치하고 그 사이에 석축을 하는 수법을 사용하였고 상면의 상석배치도 같은 수법을 사용하였으나 나머지 고분은 목곽의 흔적 없이 입구 쪽 단벽을 제외한 삼벽 면을 먼저 쌓고 입구 쪽 단벽은 상단부를 개구하였다가 최후에 폐쇄시켰다.
상면은 3호분은 일부 공지를 남기고 전면에 상석을 깔았으나 1·4·5호분은 중앙에 철상의 관대를 두고 양측 공간을 부장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양산 부부총을 비롯한 신라지역 횡구식 고분에서 자주 확인되는 예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추가장의 흔적을 1호와 4호에서 확인하였으며 순장의 경우 1호분에서 3명, 3호분에서는 2명이 묘도와 석실 내부에서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장경호·유대장경호·파수부유대완·유개고배·개·개배 등의 토기와 은제조익형입식·목걸이·금제귀걸이·은제과대 등의 장신구, 대도·도자·소도자·철모·호록·철촉 등의 무기류, 철제보습·철겸·철부 등의 농구·등자·교구·운주·편원어미형행엽·철제재갈·삼환령 등의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이 고분들은 5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축조된 것이며 피장자는 창녕지방 토착세력 중에서 우두머리에 해당되고 신라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자였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고분의 규모와 출토유물의 특징에서 그 추정이 가능하며 이로 미루어보면 창녕은 최소한 5세기 대에 들어서면서 신라 문화권 또는 신라 영역권 내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